주께로 (21년 4월호 칼럼) 본문: 요20:11-18/ 제목: 부활의 목격자
왜, 마리아, 요한, 그리고 베드로는 밤 새 무덤 앞에서 야영을 하며 지키고 있지 않았는가? 예수가 “나는 삼일 째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셋째 날에 제자들이 무덤 주위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이 놀랍습니다. 심지어 열정적으로 헌신한 막달라 마리아 조차도 텅 빈 무덤을 보았을 때, 부활의 가능성은 생각 해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은 기적을 보고자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희랍인, 로마인들은- 인간의 몸을 포함해 모든 육체적인 것은 약하고, 정신적인 것이 강하고, 선한 것의 근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따라서 구원이란, 육체로부터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육체의 부활이란 바람직한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육체에 관해 희랍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가졌습니다. 유대인들 중의 일부는 마지막 때에 의인들이 모두 부활하리라는 믿음을 가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유대인이든, 희랍인이든, 로마인이든-어떤 개인을 죽음에서 다시 살릴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생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워온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신이란 완벽하게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이 이들의 신관 이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을 종합해보면 1세기 유대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제자들이 부활을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가 정말로 살아있음을 제자들에게 확신시켜주고자 한다면 예수를 여러 번 보았다든지 직접 손으로 만져보았다는 등, 목격자들의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고대인들도 현대인들처럼 기적이란 일어날 수 없다고 믿을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의 확실성입니다. 본문에서 부활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가 있습니다.
첫 번째, 목격자가 누구인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시 여자들은 유대 법정에서도 로마 법정에서도 증언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여자의 증언은 믿을 수도 없고 따라서 증거로 채택이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종교나 운동을 확장하기 위해 부활이야기를 꾸며냈다면 절대로 여자를 최초의 목격자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의 부활 기사에서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은 여자들입니다.
어째서 하필이면 여자들이 저 기사에 등장을 하는 것입니까? 여자의 증언은 믿을 수 없다고 치부되던 때,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들은 어째서 여자를 내세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대답은 단 하나, 즉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란 것입니다. 틀림없이 마리아는 거기 있었고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보았던 것이 틀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서 저자가 그렇게 써야할 아무런 동기도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요. “시몬 베드로가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여기서 ‘보았다’는 단어는 심사숙고하고 소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부활하여 일어났다면 머리를 쌌던 수건과 세마포는 온통 찢어지고 풀어헤쳐져 있을 거야, 만약 친구들이 시체를 가져갔다면 도대체 옷을 벗겨 시체를 욕되게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수건과 세마포에 싼 채로 가져갔을 테지, 반대로 적들이 한 짓이라면 도대체 왜 옷을 벗겨 단정하게 놓아두었겠어? 말도 안 되지” 모든 가능한 가설들을 생각하나 믿음은 추론만으로는 믿음에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이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요20:11-18).
두 번째, 왜 울고 있는냐?
시작 부분부터 우리는 이 만남이 놀랍도록 온화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왜 울고 있느냐?”의 질문은 사실 마리아를 향한 부드러운 훈계로 그녀가 깨어나도록 부르는 것입니다. 또 “누구를 찾고 있느냐?”는 질문은 “자신의 시야를 좀 더 넓히고 예수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깨달으라”는 보다 날카로운 촉구의 질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의 질문을 오해하고 그가 동산지기이고 예수의 시체가 어디로 옮겨졌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녀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다시 한 마디를 던질 뿐입니다.
“마리아야!”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개인적입니다. 만약 예수가 인류 전체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은 것은 믿으면서 그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를 믿음으로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니 예수의 친절함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마리아는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지만, 가짜 예수를 찾고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보다 가짜 예수를.... 따라서 예수가 그녀를 찾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결코 예수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우리들처럼, 은혜를 통해서 오는 것이지 그녀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살아있음을 마리아가 알게 된 순간 예수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라는 메시지를 주어 마리아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는 최초의 부활의 목격자이며,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기독교인이란? 예수가 죽었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남을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을 겪은 사람입니다. 예수는 어느 누구라도 손쉽게 최초의 메신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선택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공동체의 대들보 같은 인물이 아니라 여자를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막달라 마리아의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 안의 무엇인가가 영원히 달라질 것입니다. 최초의 기독교인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은혜가 우리 믿음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은혜는 우리 믿음의 내용이기도 하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는 위대한 스승이었고 그의 도덕적 처방에 따라서 살 때 그가 도와주고 기도에 응답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아직도 기독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믿음이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은 아닙니다. 진짜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순전히 은혜로 받아들여지도록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했음을 믿는 것입니다.